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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_별별시선] 마을과 일상

[별별시선]마을과 일상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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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팔트 키드’가 가득한 도시에서 마을이 뜨고 있다. 지자체들은 앞다투어 마을과 공동체와 커뮤니티를 이야기하며 ‘마을 만들기’를 한다고 나서는 중이다. ‘마을공동체’를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된 후 2017년까지 총 975개의 마을공동체 조성을 지원하고 3180명의 활동가를 양성하겠다는 방안까지 내놓은 박원순 시장의 서울시가 대표적이다. 재개발 열풍이 휩쓸고 지나간 구도심을 재생하는 해법으로 마을을 선택하는 지자체도 있다.

화제가 되다 보니 친구들을 만난 자리에서도 이 얘기가 나왔다. 의견은 분분했지만 결론은 하나로 좁혀졌다. 막상 내가 살고 있는 동네가 마을공동체가 되는 건 싫다는 거였다. 일단 살고 있는 동네에서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잘 모른다. 2년 후에 전셋값 올려달라고 해서 이사 가야 할지도 모르는 동네에 정 붙이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옆집 숟가락 개수까지 다 알고 지내야 하는 공동체가 불편할 뿐만 아니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도서관을 이용하거나 동아리 활동을 하는 수준이면 몰라도 그 이상으로 내 삶에 간섭해 들어오는 건 원치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지금 진행되는 마을 만들기와 공동체는 요즘 사람들의 이러한 정서를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익명성이 보장되는 대도시에서 소비자로 살아온 사람에게 ‘그동안의 라이프스타일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나라’고 요구하는 느낌이다. ‘어렵고 힘들어도 사람 사는 정이 있었다’며 그때 그 시절을 낭만처럼 제시한다는 것도 거북하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간디의 말은 대부분이 농사를 짓고 비슷비슷하게 살았던 근대화 이전의 농촌마을 공동체에서나 가능한 이상이지 아파트 가득한 도시에 적합한 모델은 아니다.

어떤 이상화된 모델을 놓고 모든 지역을 맞춰나가거나 ‘같이 살면 좋다’는 낭만적인 접근 대신 내가 사는 지역에 무엇이 필요한지부터 분석하는 게 먼저일 것이다. 필요로부터 시작하는 마을만들기는 구체적이고, 지속가능한 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 구성원에 따라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해결할 문제는 무엇인지를 세세하게 따져 보는 것이 중요하다. 성미산마을이 맞벌이 부부들의 육아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육아공동체로 시작했고, 요즘의 농촌은 오히려 경제공동체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은 그래서 중요하다.

결핍된 부분을 찾아낸 후 공동의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뤄가는 과정에서 공동체는 자연스럽게 복원되고, 문제의 실마리를 찾을 것이다.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더라도 최소한 동네 친구와 이웃은 남지 않을까? 이런 과정 없는 마을만들기는 모든 농촌의 지붕을 일괄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꿔버렸던 새마을운동과 비슷한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

현재 마을만들기의 한계는 분명하다. 마을이 변하고 싶어도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이 변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먹고사는 게 힘들면 가슴이 딱딱해지나봐요”라는 드라마의 대사를 떠올릴 필요도 없다.하지만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겨운’ 가난한 사람들이야말로 공동체가 만들어내는 활력과 마을에 사는 즐거움을 느낄 권리가 있다. 그렇지만 비정규직으로 해고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뿐인가? 명절 당일만 쉬는 백화점과 마트에서 일하는 엄마, 학원에 다니지 않으면 친구를 사귈 수 없는 초등생, 입시에 시달리는 중·고등학생, 스펙 쌓느라 바쁜 대학생, 야근에 지친 직장인, 일년에 두 번 쉬는 영세 자영업자들의 삶을 외면하는 마을만들기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공허하다. 다들 살아남기 위해 발 동동거리며 “바쁘다, 바빠”를 외치는데 어떻게 마을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저녁이 있는 삶’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그래서 중요하다. 주 5일제를 시행해도 주당 평균노동시간이 49.1시간을 넘는 일상을 제도적으로 정비하지 않고서는 마을도, 공동체도, 함께 사는 삶도 기대하기 힘들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서울시립대만 살펴봐도 이런 결과는 단박에 나타난다. 반값 등록금 시행 1년 만에 사회봉사활동 참여자가 1414명에서 3105명으로 2배 이상 늘고, 학교에 사회공헌팀이 생긴 것은 학생들이 갑자기 착해지거나 공동체에 관심이 많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반값 등록금 덕분이다.

서울시 마을공동체 종합지원센터장으로 변신한 짱가는 “공동체는 백수가 지킨다. 베짱이 없는 마을은 삭막한 마을이다. 마을의 백수, 베짱이 파이팅!”이라는 말을 남긴 바 있다. 마을마다 한 명씩 있던 ‘동네 바보’를 깍두기로 껴주고 함께 놀 수 있는 아이들이 사는 곳. 그곳이 아파트이든 다세대이든 대도시이든 중소도시이든, 21세기의 마을은 바로 그런 곳이 되어야 할 것이다. 무슨 행사에 몇 명이 참여했고, 경제효과는 몇 원임을 작성할 수 있는 그런 사업의 대상지가 아니라.